언론에 비친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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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건의 경우 결국 두 회사 주주총회에서 합병결의안이 통과된 뒤에도 기득권 언론들의 삼성재벌 호위 역할은 멈추지 않고 있다. 이참에 경영권 방어장치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중에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차등의결권이다.
차등의결권은 특정한 주식에 대해서 다른 주식보다 더 많은 의결권을 주는 제도다. 우리나라는 의결권이 있는 주식은 모두 1주에 1표만을 행사할 수 있게 돼 있다. 차등의결권이 도입되면 어떤 회사는 특정한 주식에 1주에 5표, 10표와 같이 일반 주식보다 더 많은 의결권을 부여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주식은 경영권을 가진 측에서 주로 보유하게 되므로 적은 주식으로도 다수의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차등의결권이 허용된 나라에서 이를 실제 활용하는 기업은 대부분 벤처기업들이다. 벤처기업들은 초기에 아주 적은 자본으로 기업을 꾸리다가 빠른 성장가도를 걷게 되면 상장하게 되는 게 일반적이다. 이때 창업자를 비롯한 기존의 소수 소유주가 가진 주식을 B클래스, 상장할 때 발행하는 주식을 A클래스로 구분한다. B클래스는 주당 의결권이 A클래스보다 높게 설정돼 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창업자들이 온갖 노력을 통해 키워놓은 벤처기업을 막강한 자본력을 갖춘 거대기업이나 헤지펀드 등이 집어삼키려 할 때 대항력을 제공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미국에서 차등의결권이 활성화된 것은 급성장하는 기술 중심 벤처기업들 때문이었다. 구글, 페이스북을 비롯한 정보기술(IT) 벤처기업들이 차등의결권을 활용한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의 창업자인 마크 저커버그는 18%의 지분으로 57%의 의결권을 행사한다. 기술 중심 벤처기업들의 경우에는 흑자로 전환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장기간 지속적인 투자가 필요하다. 그런데 단기 차익을 노리는 투자자본은 적대적 인수·합병과 같은 방법으로 장기적인 기업의 발전에 반하는 시도를 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차등의결권과 같은 장치를 도입했던 것이다. 물론 구글이나 페이스북이 이미 엄청난 거대기업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차등의결권을 벤처기업 시절처럼 계속 유지하는 게 옳은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차등의결권을 두게 된 맥락을 무시한 채 순환출자에 기대 극소수 지분으로 수십개 계열사를 지배하는 재벌 일가의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차등의결권을 도입하자는 것은 맥락에 맞지 않는 주장이다.
더구나 차등의결권은 미국에서도 이미 논란과 비판의 대상이다. 가장 큰 단점은 잘못된 경영자의 전횡을 막을 수 있는 시장의 힘을 무력화하기 때문이다. 2012년에 미국 투자책임연구센터가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2012년 기준으로 S&P 1500에 속하는 미국 기업 중에 차등의결권을 시행하고 있는 회사는 179개에 불과했다. 또한 차등의결권을 시행하는 회사의 3년, 5년, 10년 실적이 평균보다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회사는 주가의 변동성이 더 심하고 리스크에도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은 미국과는 달리 적대적 인수·합병이 거의 이뤄진 적이 없을 정도로 기업 인수·합병 시장이 폐쇄적이다. 더구나 이미 막대한 자금력을 가진 재벌 일가의 기업 지배권 방어를 위해 자금력이 부족한 미국 벤처기업들을 위한 제도를 도입하자는 게 말이 되는가. 차등의결권을 도입하면 기업지배구조는 더욱 악화될 것이다. 글로벌 투자시장에서 한국 기업의 매력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번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건에서 확인했듯이 ‘코리아 디스카운트’ 현상이 괜히 발생하는 게 아니다.
< 선대인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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